(Diary) 코로나 확진 후기

CORONA MEME

1. 코로나 더 비기닝

지금도 매일같이 몇십만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요즘.

우리 가족도 그 예외는 되지못했다.

내가 재택근무를 시작한 건 2020년 3월.

그 시기부터 가족 모임 외 모든 사적 모임에 거의 불참했다.

거의라곤 했지만 사실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밖에 나가지않았다.

내가 재직중인 회사는 코로나 이슈로 계속 재택근무 중이고 올해 6월까지 풀 재택근무를 권고한 상태이긴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약 5개월 정도 빠르게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확진자가 10명 남짓하게 나오고 모든 동선이 지도에 도식되어 제공될 정도로 숫자가 적었지만

그 확진자들이 강남의 주요 상권을 전부 지나고 있었고, 당시 살던 나의 집은 그 강남의 한복판이었다.

집 앞을 확진자가 지나가는 건 부지기수.

그리고 결정적으로 와이프가 임신 중기를 지나던 시기였다.

팀 동료들의 배려로, 나는 기저질환자와 같은 대상자가 아님에도 바로 재택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와이프는 직업상 재택근무가 불가능했기에 상의 후 무급 휴직 상태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모든 장보기를 인터넷상으로 하도록 전환하고, 가끔 먹고싶다던 과일류는 새벽 3시경 24시간 운영을 하는 서초의 하나로마트 본점까지가서 공수하는 식으로 우회하는 식으로 살았다.

시간이 흘러 확진자는 늘었으나 백신도 나오고 종식이 되냐마냐 간보기만 계속되던 2021년, 아이의 출생에도 변함없이 나의 재택근무는 계속 되었다.

2. 백신 접종

백신을 적극적으로 맞는 사람도, 개인의 신념에 따라 맞지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우리는 전자에 속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내 자식에게 혹여나 전파하고 싶지않아서 였다.

집에서 아예 안 나가는 생활임에도 혹시나 모를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접종을 마쳤다.

무엇보다 아기의 백신 접종에 대한 임상실험이 진행된 적이 없어서, 안전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대비하고자 했다.

내 아들은 어린이집 등원을 위해 마스크 쓰기 연습을 반복했다.

현실적으로 코로나고 뭐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했고, 언젠간 와이프도 직장으로 돌아가야하기 때문이다.

3. 아슬아슬한 일상생활

2022년이 되었다.

아들은 가까운 어린이집을 등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집에서 안 나가고 재택근무를 이어갔고, 자녀의 등원시에만 외출을 했다.

외출 시간은 5분에서 10분 남짓. 그것도 도보.

와이프는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의료쪽이라 무조건 KF가 강제되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KF94는 필수품이 되었다.

와이프의 회사는 점심을 배달로 가져다주는 식당이 있어, 출퇴근시간을 제외하곤 외부 활동이 존재하지않았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타협할 수 있는 외출의 마지노선이었다.

4. 첫 번째 의심증상

2월 3주차 정확히는 15일 화요일이었다.

저녁을 먹고난 와이프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평소 알러지가 없었기에 코로나 키워드와 묶어서 검색을 해보니 오미크론 확진자의 8.8%가 겪은 전조증상이 두드러기였다고 한다.

물론 해당 전조증상처럼 심하게 올라오진 않았으나, 우리는 돌다리를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자녀의 어린이집 등원을 위해 자가진단키트를 구비해두고 있었기에 바로 검사 후 두 줄(양성)이 나왔다.

즉시 와이프를 격리조치하고, 온 집안의 소독 및 환기를 진행했다.

다음날 회사는 당연히 휴가를 냈다. 어린이집도 보내지않았다.

와이프는 신속항원검사를 위해 보건소로 출발하고, 나와 아들은 다른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둘 다 음성 판정.

하지만 와이프의 신속항원검사는 양성 판정이라 PCR까지 받게 되었다.

다음날 다행히 PCR결과 음성으로 돌아와서, 키트의 오류겠거니 하며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5. 두 번째 의심증상

5.1. 2월 23일 수요일

1주일이 지나 2월 23일 수요일 밤.

와이프가 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미리 구비해둔 두드러기 약을 발라서 두드러기는 금방 가라앉았으나, 인후통이 동반된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서 즉각 격리를 재개하였다.

다음날 회사는 다시 휴가…

어린이집 등원도 중지하였다.

5.2. 2월 24일 목요일

다음날 아침 바로 와이프는 신속항원검사에서 양성을 판정받고, 바로 PCR 검사를 받았다.

나와 아들은 다른 병원에서 다시 신속항원검사를 진행했고 둘 다 음성을 받았다.

일단 아들이 음성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5.3. 2월 25일 금요일

와이프의 PCR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다.

오늘 회사도 당연히 휴가를 썼다.

동거 가족이 확진됨에 따라 나와 아들은 바로 PCR 검사를 받아야했다.

PCR 검사의 대기줄은 어마어마하게 길었고, 2시간이 넘도록 서서 기다려야 했다.

선별진료소 특성상 외부에 노출된 한 겨울의 바깥에서..

성인이라면 뭐 얼마든지 버틸만한 정도였지만 문제는 아들이었다.

두돌도 안된 아들은 말도 아직 못하는 상태였기에 아기띠에 의존해 2시간을 넘게 서있어야했다.

아들도 매우 답답해하며 발버둥을 치고, 아기띠를 벗어나려해 너무나 힘든 2시간을 보냈다.

미약하게 있던 감기 기운이 심해질까봐, 나는 패딩을 앞으로 둘러 아기를 감쌌고 2시간을 반팔차림으로 대기하였다.

검사 후 집으로 복귀하여 재택 생황을 계속 이어나갔다.

5.4. 2월 26일 토요일

PCR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는 여전히 음성, 아들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난 2년여간 최소한으로 외출하면서 버텨낸 게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쉽게 확진이 되었다.

이제 상황이 반전되어 내가 격리될 차례였다.

기존에 화장실이 딸린 안방에서 격리중이던 와이프는 환기와 소독을 시작했고, 나는 아이를 데리고 아이방에서 대기하였다.

이론적으로는 확진자와 떨어져서 지내야하지만 두돌도 안된 아기가 확진자면 답이 없다.

아기를 따로 격리해둘 수가 있나?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이 시점에서 직감했다.

지금은 음성이지만, 아마 잠복기일 거라고

확진된 아기와 24시간을 넘게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재우고 같이 잠을 자고.

내가 아무리 마스크를 잘 쓰고 있어도 100% 돌파감염될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증상이 안나왔을 뿐.

그렇게 소독 완료 후 내가 안방으로 들어가 자가격리를 시작하고 와이프는 아들과 3일만에 상봉하였다.

그리고 위에서 직감한대로 자가진단키트를 시행한 결과 두 줄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와이프한테 공유한 후, 나는 바로 보건소로 향했다.

아기없이 혼자니 뭐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내부 착오 및 행정력의 미진함으로 아들의 확진 판정 문자가 유실되었기에, 나는 신속항원검사부터 받았다.

예상대로 3분만에 두 줄이 나왔고, 바로 PCR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집에 복귀하여 자가격리를 이어나가며 앞으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니

차라리 내가 양성인 게 나았다.

가족 모두가 양성이면 따로 자가격리할 필요없이 격리기간을 그냥 같이 지내면 되는 거니까.

5.5. 2월 27일 일요일

나는 아침에 안방문을 열고 그냥 나갔다.

예상대로 양성.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지옥의 자가격리기간을 시작하였다.

5.6. 확진 타임라인

날짜 본인 배우자 자녀
2월 23일 수요일 - 의심증상 발생 -
2월 24일 목요일 신속항원검사 -> 음성 신속항원검사 -> 양성
PCR 검사 수행
신속항원검사 -> 음성
2월 25일 금요일 PCR 검사 수행 PCR 검사 -> 확진 판정 PCR 검사 수행
2월 26일 토요일 PCR 검사 -> 음성
자가진단키트 -> 양성
신속항원검사 -> 양성
PCR 검사 수행
확진 상태 PCR 검사 -> 확진 판정
2월 27일 일요일 PCR 검사 -> 확진 판정 확진 상태 확진 상태
자가격리 해제일 3월 5일 00시 3월 3일 00시 3월 4일 00시

6. 후속조치

회사의 인사팀 가이드라인에 따라 나는 격리해제일인 3월 4일 금요일까지 병가를 신청했다.

무려 9일간의 휴가를 낸 것이라 후폭풍이 두렵긴하지만..

전염성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해주는 회사에 고마움을 느꼈다.

6.1. 잘 대비한 점

(1) 상비약 구비

자녀가 음성 상태임에도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였다.

와이프가 해열제를 비롯해 감기약을 풀세트로 집에 구비해둬서, 코로나 확진 이전부터 고열 관련 케어가 진행중이었다.

자가격리 기간내에도 38도 중반을 넘기지않고 스무스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자가격리라서 약을 퀵으로 받거나, 못 구해서 발을 동동구르는 상황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외부에 뭔가 요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격 의료진료도, 코로나 전담 약국 신청도.

(2) 회사 인사제도와 문화

휴가를 미친듯에 냈기에 새벽시간에도 상관없이 계속 고열의 자녀를 케어할 수 있었다.

이런건 인사제도의 승리라고 봐야할까?

혹시 몰라 사유없이 당일 연차를 이틀 연속으로 사용했었는데, 팀 문화가 잘 되어있어서 별 잡음없이 휴가를 낼 수 있었다.

(3) 생존주의 시뮬레이션

난 평소에 생존주의를 취미삼아 찾아본다.

최종 꿈은 지하벙커가 있는 전원주택을 짓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않고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별도의 장비를 갖추거나 하는 거 없이 그냥 상상만 막연히 하는 수준이다.

이번 코로나도 일종의 아포칼립스 상태라고 보고, 확진자 발생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평소에 시뮬레이션을 종종 머릿속에서 돌려보었다.

어떤 물건을 어디로 옮기고 어떤게 필요한지 미리 생각해둔 덕분에, 가족이 코로나 검사를 받고 오는 그 사이에 모든 자가격리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4) 본인의 멘탈?

나는 어차피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밖에 잘 나가는 편이 아니었다.

대학교때는 합숙을 빙자해서 한 달을 못 나간 적도 있었고.

그게 힘들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냥 태생이 슈퍼 집돌이인 것.

애석하게도 코로나 확진 전이나 확진 후나 내 생활은 전혀 바뀌지않았다.

6.3. 힘들었던 점

(1) 육아

와이프만 격리상태일때, 집안일과 육아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했다.

나도 아빠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외부에 외출없이 집안에서 견디기만 하는 육아는 정말 힘들었다.

자녀는 의심기간까지 무려 9일을 집안에 갇혀서 보냈기에 너무 답답해했다.

말이 트인 나이도 아닌지라 더 짜증을 냈던 듯…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 밤 계속해서 장난감을 구매했다.

편백나무 칩도 잔뜩사서 키즈카페마냥 깔아두기도하고, 저렴하면서 흥미 보일만한 것들을 무지성으로 구매하였다.

비싼 건 안 사줬다. 바로 부셔버리니까.

그냥 싼 장난감들로 하루 하루 버텨내는 데 의의를 두었다.

사실 계속 집안일하고 밥해서 먹이고 격리자한테 전달하는 건 쉬웠으나

말이 안 통하는 아기에겐 협조를 구할 수 없으니 육아가 최고로 힘들었다고 꼽겠다.

6.3. 개선했으면 하는 점

(1) 행정의 마비

확진자가 10만 20만씩 나오던 시기인지라, 관련 공무원들이 엄청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정도 자동화되었다면 좋을텐데..

와이프는 확진된 이후 3일만에 자가격리 통지를 받았다.

관할 보건소간의 이전도 제대로 처리되지않았으며,

자녀의 검사에 대신 입력한 내 두 번째 전화번호의 전환 요청도 민원으로 유선 접수하였으나 반영되는 것 없이 격리기간을 마쳤다.

이로 인해 이틀 연속 동거 가족이 확진되었음에도 나는 신속항원검사부터 받을 수 밖에 없었다.

(2) 선별진료소 패스트트랙의 필요성

선별 진료소에 줄이 너무 길어지며 대기시간도 덩달아 급증했다.

임산부의 경우 별도의 안내가 있던 것 같은데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패스트트랙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말이 통하고, 자아가 있어서 같이 기다려줄 수 있는 아이도 아니고 두돌도 안된 자녀를 데리고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

확진율이 3명 중 1명이 확진이라는 데, 일상 생활보다는 선별진료소에서 대기하다가 확진되는 사람도 많겠다 싶었다.

특정 기준을 정해서 투 트랙으로 운영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러한 점 또한 내가 부모가 아니었다면,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터였다.

7. 마무리하며

어찌어찌 재택치료 기간이 지나 우리 가족을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 아들은 이제 항체 보유자가 되었을 것이다.

계속 조심하겠지만, 그동안 조심해왔던 외출에 대한 정책을 조금 완화하기로 했다.

실내나 관광지는 아직 무섭고, 여기저기 야외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그리고 많은 걸 체념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미 걸렸다가 끝난 걸 뭐 어쩌겠나.

빠른 종식으로 모두가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